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 - 부자를 꿈꾸는 상상충전소
IT 및 생활 정보 / / 2023. 2. 15. 12:48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

공식적으로 "팔메토 주"라는 별명을 가진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1788년 5월 23일 미국에 합류한 8번째 주였다. 인구는 5,148,714명으로 23번째로 인구가 많은 주이다.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와 조지아 주에 인접해 있습니다. 총 82,932 평방 킬로미터의 땅과 물이 있는 이곳은 40번째로 큰 주이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주도는 콜롬비아로, 이 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기

1. 사람들은 적어도 10,000년 전부터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살고 있어요.

 

북미에는 기원전 13,000년경 고생대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처음 거주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론이 그렇듯이, 그들은 오늘날의 러시아 극동에서 베링 해협에 있는 육교를 통해 북미로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더 나은 사냥터와 더 쉬운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에 흩어져 살았다.

기원전 8000년경, 우리가 현재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알고 있는 지역에는 주로 유목 생활을 하는 고생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1,000년까지, 이들은 더 복잡한 사회 구조를 발달시켰고, 적어도 반영구적으로 마을에서 살기 시작했고 그들이 재배한 농작물을 통해 먹고살기 시작했다.

 

2.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들은 스페인인들이었다.

16세기초, 1514년 8월에서 1516년 12월 사이, 스페인인 페드로 데 살라자르가 이끄는 탐험대가 케이프 피어와조지아사이의 오늘날의 캐롤리나 해안에 상륙했다. 살라자르는 500명에 달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어 당시 뉴 스페인의 일부였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데려왔다. 스페인은 영국보다 훨씬 먼저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식민지화하려고 시도했다.

 

스페인의 첫 시도는 1526년 스페인 탐험가 루카스 바스케스 데 아일론이 이끌었다.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위냐만에 정착지를 설립할 계획이었으나 불리한 여건을 발견해 현재의 조지아 주로 이주했다. 프랑스는 1562년에 처음으로 그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려 했고 포트 로열 사운드에 있는 찰스포트라는 요새를 잠시 동안 보유했다. 1566년, 스페인은 그 요새를 점령하고 1587년까지 지배했다.

 

영국은 훨씬 후에야 그 지역을 식민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670년, 영국인들의 첫 번째 시도는 애슐리 강의 서쪽 둑에서 알베말 포인트라고 불리는 정착촌을 자리 잡았으며 10년 뒤 오늘날 찰스턴시가 있는 근처의 보다 좋은 환경으로 정착촌을 옮겼다.

 

3. 노예제도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건국의 중심이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항해해 500명의 미국 원주민을 노예로 만든 첫 번째 배를 시작으로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우스 캐롤라이나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길고도 황량한 노예제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 미국 원주민들은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과 맞교환되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그 지역을 몰랐기 때문에 그래서 더 순종적이었다.

1708년까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는 백인 정착민보다 노예가 더 많았는데, 농장에 기반을 둔 이 지역의 경제는 전적으로 노예 노동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4.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미국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많은 식민지 주민들은 대표권 없이 계속 증가하는 세금에 격분했다.다른 한편으로, 사우스 캐롤리나 무역의 많은 부분이 영국과의 무역이었다. 그래서 식민지는 충성파와 애국파로 거의 반반씩 나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혁명 전투의 약 3분의 1이 다른 식민지보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더 많이 발생했다. 이러한 전투의 대부분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패트리어츠와 로열리스트 사이에 벌어졌으며, 그들의 군대는 종종 그들의 동맹인 체로키 민족에 의해 강화되었다.

 

5.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또한 미국에서 가장 먼저 분리한 주였다.

노예제도의 폐지는 19세기에 큰화두가 되었지만 사우스 캐롤라이나에는 노예제도의 폐지가 없었다. 이때까지 인구의 대부분은 노예가 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구성되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백인들은 흑인 인구가 자유로워지면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이 사라질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또한 여전히 거의 노예 노동에만 의존했고, 그러한 행동은 그들의 재정적 전망을 파괴할 것이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선출되었을 때,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1860년 12월에 가장 먼저 연방에서 탈퇴했다. 1861년 2월 8일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다른 6개 주에 합류하여 미국 연방을 형성하였다.

 

6.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공식 나무는 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공식 주 나무인 팔메토 나무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상징이 되었다.

1776년, 영국군의 애국자들로부터 찰스턴을 보호하기에 완벽한 장소인 설리번 섬에 몰트리 요새(옛 설리번 요새)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요새는 주로 일반 야자나무의 작은 사이즈의 팔메토 나무의 통나무로 지어졌다. 1776년 6월 영국군이 공격했을 때, 그들은 요새의 성벽을 파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지나가면서 포탄을 퍼부었다. 팔메토 통나무는 매우 부드러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나무처럼 부딪혔을 때 부서지는 대신 대포알의 힘을 흡수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시점부터, 이 팔메토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특별한 명성을 얻었고, 마침내 공식적인 주 나무가 되었고 주에 "팔메토 주"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